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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5조회수 : 505

전통공연예술학과 김동원 교수, “글줄기로 춤사위로 노랫가락으로 되살아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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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공연예술학과 김동원 교수 기고문]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어령 선생 강연 단체사진

[지난 2019년 4월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에서 이어령 선생의 강연을 듣고 다함께 찍었다.

앞줄 왼쪽부터 임동창 작곡가, 안숙선 명창, 이어령 선생, 김덕수 대표. 뒷줄 왼쪽 필자 김동원 교수와 주재연 예술감독.

사진 김동원 교수 제공(출처:한겨레)]


고 주재연 연출감독의 빈소

[지난 8월27일 별세한 고 주재연 연출감독의 서울아산변원 빈소. 사진 김동원 교수 제공(출처:한겨레)]


순록, 너는 순록 같았다. 1993년 어느날, 사물놀이 사무국에서 너를 처음 본 순간 너를 본 첫 인상은 뿔이 높은 순록이었다. 고향 포항에서 사물놀이 초청 공연을 연 뒤 출연료를 제대로 마련 못한 미안함으로 김덕수 사물놀이 한울림 예술단에 입단한 너, 주재연. 너의 자신감은 너의 키만큼이나 높았고 너의 호기심은 너의 머리털만큼이나 빽빽했고 너의 열정은 너의 얼굴만큼이나 화사했다.


훗날 들으니,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나와 연구소 산업요원으로 병역 대신 5년간 복무해야 했으나 곧 그만두고 군대를 다녀온 뒤 방송국 피디시험을 준비하다 우연히 김덕수 사물놀이 공연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어. “음악과 장면이 머릿속에 박혀 떠나가지 않았다. 왜 이 좋은 걸 이제 알았지?”. 그 길로 공연 로드매니저로 나선 너. 다들 미쳤다고들 했지. 하지만 나 역시 공대 출신으로, 3년 먼저 사물놀이에 미친듯 빠져들었기에, 우리는 순식간에 의기투합할 수 있었어. 그리고 그렇게 30여년 너는 꽹과리·징·장고·북 네가지 타악기 만으로 신명을 빚어내는 사물놀이의 세계화에 청춘을 바쳤다.


한국, 전통, 국악, 사물놀이 같은 단어와는 너무나 멀어보이던 인상을 가졌던 너. 그런 너는 타고난 열정과 성실함으로 사물놀이가 가장 아쉬워하는 기획과 운영을 채워나갔다. 아니 책상머리에서 펜대 굴리는 것을 넘어 사물놀이의 로드매니저이자 무대감독으로, 조명과 음향은 물론 국외연주때 통역에다가 사물놀이의 신성한 깃발, 낭대를 들고 행진을 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연주자의 빈자리를 메꾸기도 했었다. 2001년 김덕수 사물놀이패를 ‘난장컬쳐스'라는 이름으로 법인화하고 2017년까지 대표이사를 맡았지. 너와 함께 부여의 사물놀이교육원을 설립하고 해마다 세계사물놀이겨루기한마당을 일구었던 일도 잊을 수가 없구나.


또한 판소리 다섯바탕 공연을 세계 각지에서 마련해서 판소리가 세계문화유산이 되게 한 것도 너의 공이었다. 2002년 파리가을축제에서 열린 안숙선 명창의 ‘판소리 완창 공연'을 비롯해 미국·유럽·러시아 등 내로라하는 세계 각지 축제에 우리 가락을 소개했다. 그 공연 횟수만 2000회가 넘었다.


2012년 아리랑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자, 이듬해부터 서울아리랑페스티벌 예술감독을 맡은 너는 해마다 10월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서 새로운 아리랑 공연을 선보였어. “음악가들이 자신들만의 아리랑을 갖고 있었으면 한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는구나.


순회공연 단체사진

[1997년 김덕수 사물놀이와 레드선의 3집 음반 <미스터 장고> 발매 기념 순회공연 때.

뒷줄 맨왼쪽이 사물놀이 한울림 예술단 기획실장이던 고 주재연 예술감독, 앞줄 왼쪽부터 사물놀이 예술단 김복만·김덕수·강민석·홍윤기.

사진 김동원 교수 제공(출처:한겨레)]


궁중문화축전에서 찍은 사진

[김덕수 주재연_2019년 궁중문화축전에서(출처:한겨레)]


고 주재연(오른쪽)연출감독과 김동원(왼쪽)교수

[고 주재연(오른쪽) 연출감독과 김동원(왼쪽) 교수는 1993년 김덕수 사물놀이 사무국에서 만난 ‘30년 지기’였다.

지난 2004년 봄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함께한 모습.

김동원 교수 제공(출처:한겨레)]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를 가진 너였기에 그 모든 것을 기꺼이 해낼 수 있었음을 여기 남은 우리는 안다. 아, 사물놀이는, 국악계는, 한국의 문화예술계는 너, 주재연에게 빚을 졌구나.

호랑이, 그러고 보니 너는 호랑이 같기도 했다. 네가 열정을 불사르던 축제의 현장에서 너는 호랑이였다. 너는 그날, 그곳을 찾는, 시민 대중의 몸과 마음을 채워 줄 프로그램의 성공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용감한 호랑이였다. 인상 쓰고 싸우고 겁을 주는 호랑이가 아니라 우리의 민화처럼 용맹하되 친근한 수호신장 같은 호랑이였다.


누구보다도 앞을 서서 헤쳐 나가면서도, 누구보다도 찾아주는 시민들의 눈으로 현장을 살피고, 그리고 누구보다도 현장에서 고생하는 식구들을 걱정하고 챙기던, 너는 우리들에게 문화지킴이이자 호랑이였다.


그런데 여름 끝자락에 불쑥 날아온 비보, ‘고향 선영에 벌초를 하러갔다가 쓰러져 깨어나지 못했다. 향년 57.’ 아, 그런 너를 이렇게 보내야 하는가? 이렇듯 아까운 너를, 어찌 이렇게 보내야 한단 말이냐? 우리를 이리 남겨두고 어떻게 그 먼 길을 가려는가?


네가 없는 놀이판에서 우리들은 어떤 노릇으로 신명의 불꽃을 지필 수 있다는 말인가? 후여, 후우여~~~, 후루루루루루~~~, 아, 천지신명이시여!


우리 벗, 주재연의 설운 넋을 받아 품으소서! 하늘에서 품으시고 땅에서 되살리소서! 그리하여 해년마다 철철이 꽃으로 바람으로, 빗줄기로 햇살로, 별빛으로 달빛으로 보내주소서!


그리고 우리 남은 이들의 글줄기로, 춤사위로, 노랫가락으로 되살아나 다시 만나게 하소서! 다시 보게 하소서! 다시 하나 되게 하소서!


김동원/원광디지털대 교수·전 김덕수사물놀이 연구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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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줄기로 춤사위로 노랫가락으로 되살아나게 하소서!”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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